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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sure > Sports > 신라주의 관점에서 본 <고구려주의vs.신라주의>

 
작성일 : 20-06-30 15:24
신라주의 관점에서 본 <고구려주의vs.신라주의>
 글쓴이 : bL2un054
조회 : 4  

세줄요약

고구려주의에 따르면 신라 이후의 역사는 한반도에 안주한 자주성을 상실한 역사.

그러나 한민족이 한반도에 뿌리내린 것은 체제의 유지와 농업생산력 때문.

신라주의는 현대적으로 보면 경제학과 유사하다.

 


오늘 알아볼 쟁점은


 묘청.jpg 신라주의 관점에서 본 <고구려주의vs.신라주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1135)>

"고구려주의 대 신라주의" 이다.

 

해당 쟁점의 현대화는


단재신채호.jpg 신라주의 관점에서 본 <고구려주의vs.신라주의>

단재 신채호 선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신채호는 1135년 묘청의 서경 천도 시도를 한국사의 일대 분기점으로 보고, 이때 묘청이 아니라 김부식이 승리했기에 한국역사에 다음과 같은 영향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포기하고 한반도에 안주하게 되었다.

-자주성을 상실하고 중화사대주의에 물들었다.

결론: 일제식민통치를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우리의 자주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관점은 현재까지도 사학계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상식적 통념으로 자리잡는다.

즉, 고구려주의의 관점에서 역사관이 정리된 것.


반면, 신라주의에 입각한 관점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신라주의의 정당성은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정복과 확장이 아닌, 통치와 지속

고구려주의가 정복과 확장=>당나라에도 맞서는 자주성에 중점을 둔다면, 

신라주의는 통치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에 중점을 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이다.


고구려는 약탈경제였기 때문에=토지가 척박해 자급하지 못 했기 때문에 정복과 확장을 주요정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음.

반면, 신라는 농업경제를 중심으로 자급하였기 때문에 농업생산을 뒷받침하는 것을 주요국가시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결과, 세계사적으로 유례 없이 두드러지는 긴 왕조사가 나타남.

신라 300년, 고려, 조선 각 5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흔치 않은 사례라는 것.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dZEMhaRx6g

00분 43초부터.




2. 문제는 영토의 광활함이 아니라 생산성이다.


신라주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면 결국 경제학이라 할 수 있음.


신라는 왜 대동강 이남

고려는 왜 청천강 이남

조선은 왜 압록강 이남의 영토에 만족했는가?

 

신라주의의 대답은 농업생산력.

 

고구려가 자리잡은 곳은 산간지역이었기에 그 남쪽의 영토보다 경제성이 부족했음. 경제적으로 굳이 북방으로 진출해봤자 경제적이지 않았던 것.

또한 북방민족의 침략 위험도 상당했다는 대외적 요인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음.

 

* 반대로 왕조가 바뀌면 왜 영토가 확장되었는가?란 질문의 대답도 농업생산력이라 대답할 수 있음. 척박한 땅이라도 개간할 수 있는 농법과 기술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추가 쟁점농업경제가 약탈경제가 더 우월한가?

자기가 더 풍족하게 살면 굳이 수고들여가며 남에 것을 뺐을 이유는 없음. 중국의 역사는 야만족 침략의 역사라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이는 중국은 배부르고 야만족은 그렇지 못 했기 때문.

-> 파생 쟁점: 왜 서구는 대항해시대를 열 동안, 중국은 그러지 않았나? 서구는 배고팠고 중국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

 

추가쟁점2 신라주의의 핵심은 유교 이념이다.

농민지천하지대본 : 농업생산력 중시한 유교근본이념

농법, 시비법, 관개: 농업생산력 제고 정책

토지제도: 생산성 향상

조세제도: 국정운영의 근간

*신라주의는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한반도에 고유한 쟁점이기 때문에 이를 세계사적으로 파악한다면 유교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추가쟁점3 묘청이 승리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 100년도 못 가 묘청이든 묘청 후계자는 정쟁으로 살해당했을 것.

동양사에서 도교나 불교세력이 권력을 잡은 사례는 적지 않음. 

그러나 공통적으로 조세를 과도하게 수탈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좋은 결말을 보지 못 했다는 공통점이 있음. 

(향락에 빠지기 전에 암살당하거나)


중국의 황건적, 연개소문, 궁예, 조선 명종 문정왕후와 결탁한 보우 등이 그러함.

애초에 도교와 불교는 수양학이지 통치학이 아님.

 

추가쟁점4 신채호 사관의 아이러니

19세기 서구 사학계는 동아시아 정체성론을 주장했음. 중국 진나라 이래로 동양은 천년이 넘도록 정체된 상태라는 것.

일본제국주의 사학계도 조선이 노예제 상태에서 정체했다고 주장.

신채호는 이에 반발해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고구려주의의 현대화를 시도했던 것.


그러나 신채호의 관점을 따른다면, 결과적으로

묘청의 패배 이래로 천년 간 한민족은 자주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름.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할 소지가 있다는 것.


이는 슘페터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지 못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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